2026년 2월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는 장항준 감독, 유해진·박지훈 주연의 한국 사극 영화입니다.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과, 그와 함께 살게 된 마을 촌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. 개봉 30일 만에 누적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하며 국내 34번째 천만 영화에 이름을 올렸습니다.

유해진이 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
유해진이 나오는 영화라고 하면 어느 정도 믿고 보게 되는 배우가 됐습니다. 장르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온 배우인데, 이번 사극에서도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. 엄흥도라는 인물은 특별히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. 먹고살기 바쁜 가난한 마을의 촌장인데, 어쩌다 보니 유배된 어린 왕과 한 공간에서 살게 된 인물입니다. 영웅적인 캐릭터가 아닌데도 유해진이 연기하면 그냥 넘어가지지 않는 장면들이 생깁니다.
유해진 특유의 강점은 대사가 없을 때도 많은 걸 전달한다는 점입니다. 왕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, 어찌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모른 척 외면하지 못하는 그 감정을, 표정과 몸짓으로 자연스럽게 담아냅니다. 사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어색함 없이 녹아드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. 현대물에서 보던 이미지와 다르지 않은데도 사극 문법 안에서 전혀 이질감이 없습니다.
이 영화에서 유해진의 역할은 단종의 곁을 지키는 사람입니다. 거창한 결단을 내리는 인물이 아니라, 매일의 일상에서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. 그 변화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보여주는 연기가 영화의 감정적인 무게를 만들어냅니다. 권력 앞에서도,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리면서 결국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인물을 유해진이 설득력 있게 그려냈습니다. 스타뉴스 리뷰에서 역시 유해진이라는 표현이 나온 게 과장이 아니었습니다.
박지훈의 단종, 눈빛 하나로 설명한 비극
박지훈이 단종을 맡는다고 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던 분들이 있었을 겁니다. 사실 저도 아이돌 출신 배우가 조선의 비극적인 왕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고 박지훈이 배우로서 활약한 작품을 본 적이 없었어서 더욱 그랬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의문점이 사라졌습니다. 대사가 많은 역할이 아닌데도 눈빛과 표정, 몸짓만으로 이홍위라는 인물을 설명해 냈습니다. 어리지만 왕이었던 사람, 모든 걸 빼앗기고도 품위를 유지하려는 사람의 비극이 그 안에 다 있었습니다.
장항준 감독이 박지훈과 일대일 리딩을 가장 많이 했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, 그 준비가 화면에서 느껴졌습니다. 특히 감정이 폭발하지 않고 안으로 삭이는 장면들에서 박지훈의 연기가 빛납니다. 소리를 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방식이 아니라, 꾹 참고 있다는 게 보이는 연기. 그게 오히려 관객을 더 먹먹하게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. 단종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가진 슬픔의 방향과 딱 맞는 해석이었습니다.
아이돌 출신 배우로서 이 정도 무게감의 역할을 소화했다는 것 자체가 박지훈 커리어에서 중요한 지점이 될 것 같습니다. 유해진과의 호흡도 기대 이상이었는데, 나이도 경력도 다른 두 배우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영화의 중심을 함께 잡아가는 방식이 자연스러웠습니다. 단종의 비극을 알고 들어간 관객도 박지훈의 표정 앞에서 멈추는 장면들이 있었고, 그 장면들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습니다.
장항준 감독이 천만 관객을 모은 이유
장항준 감독의 첫 사극이라는 점이 개봉 전 주목을 받은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. 전작들과 전혀 다른 장르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사극을 풀어낼지 궁금증이 있었는데, 결과적으로는 묵직한 역사물보다는 두 인물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 방향을 택했습니다. 단종의 유배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면서도, 그 안에서 펼쳐지는 엄흥도와 이홍위의 일상적인 장면들이 영화의 온도를 조절합니다.
천만 관객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건 한 집단이 아니라 다양한 관객층이 봤다는 뜻입니다. 역사에 관심 있는 관객, 두 배우의 팬, 가족 단위 관람객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영화여야 가능한 수치입니다. 왕과 사는 남자는 사극이지만 지나치게 무겁지 않고, 웃음 포인트가 있으면서도 감동을 놓치지 않는 균형을 잡아냈습니다. 어렵지 않은 사극,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이 흥행의 핵심이었습니다.
비평 쪽에서는 편집 리듬이 가끔 감정의 흐름을 끊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. 완벽한 영화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. 그러나 유해진과 박지훈이라는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그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합니다. 보고 나서 잠깐 멍해지는 영화, 단종이라는 인물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점에서 사극 팬이 아니어도 한 번은 볼 만합니다. 역사 교과서에서 짧게 배운 이름이 이 영화를 통해 훨씬 선명하게 기억되는 경험, 그게 천만 관객이 남긴 공통된 감상이었습니다.